Manual for Nomad

임성수

2024. 3. 15. - 4. 12

작가노트

작업에 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작자의 자화상이자 무의식을 반영한 아바타이다. 화면 속에서 끝없는 미션을 수행하는 주인공은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어리숙해 보이고 친근한 얼굴 을 지닌 캐릭터는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성별도 정체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나와 주변인 더 나아 가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의식을 투사한 캐릭터는 일련의 사건 사고 속으로 휘말리며 잔 잔한 이야기부터 인간의 내면 깊은 무의식적 상징성과 암시를 매개로 알레고리를 담아내려 한다. 근본 없이 등장하여 나열되어 있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몸은 약식화되어 있고 머리와 미묘한 표정 이 강조되어 있는 형태이며 머리에는 항상 모자나 헬멧 같은 형식의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등장하 는데 주로 솔방울 모양 이거나 원뿔 형태의 깔때기, 물방울 형태 등등 주로 하늘로 솟아 올라와 있는 형태들이다.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딱히 있지도 않다 정체성이 모호한 만큼 지칭도 모호 하다. 때로는 신체 여럿으로 분신시키거나 변신시켜 이미지 속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 들은 서사 구조를 가진 듯 보이지만, 이야기 순서를 뒤섞어 놓음으로써 일종에 인식의 흐름 속에 균열을 만드는 것이다. 불편할 수도 있는 균열은 오히려 지루해질 수 있는 관 전 포인트를 전환해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즉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일관 된 설정은 타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상상력을 통해 완성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번 스페이스 mm 전시장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는 초기작에서 보여주던 매뉴얼 시리즈를 다시 등장시켰다. 개인적으로는 풀어내고 싶어 하는 여러 스타일 중 하나인 매뉴얼 시리즈는 나의 작 업 색을 강하게 보여주는 카테고리 중 하나이다. 설계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를 설 명하자면 아무래도 어린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데 딱히 밖에 나가서 놀기보다는 학 교 앞 문방구에서 구입한 복잡한 형태의 프라모델을 조립하며 놀기 좋아했다. 그런 프라모델 장 난감에는 조립에 필요한 설계도가 항시 같이 동봉돼 있었고 그 설계도를 지도 삼아 장난감을 완 성 시켜나가던 그 정서까지 연결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도 장난감 조립보다 설계도 를 모으는 것이 나에겐 일종에 취미였고 자연스레 그것들을 따라 그려보기도 했던 거 같다. 물론 요즘에도 이케아(IKEA) 매장에서 구입한 가구를 매뉴얼을 숙지하며 조립하고 있자면 아스팔트 키드라고 지칭되는 어린 시절 즐겁게 집중했던 놀이에서의 유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 다. 이번 전시에 풀어내고자 하는 매뉴얼 시리즈는 기본적 형식은 가리키는 시선의 방향을 제어해 주는 설계도 형태에 기대고 있다.

통상적으로 매뉴얼은 어떤 상품이나 물건 등의 사용법과 기본적인 설명을 통하여 제품을 제대로 사용하게끔 하는 용도지만 그런 설계도는 해석에 의견은 있을 수는 있어도 상상력의 공간은 필 요치 않는다. 그런 지점을 여러 번 꼬아서 정보전달이 차단된 설계도를 만들면 타자들은 관성에 의하여 매뉴얼을 해석하다가 함정에 빠지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매뉴얼에 기능을 상실된 방식으로 작업을 읽어 나가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매뉴얼 작업을 하는 이유는 타자들의 해 석을 통해 작품을 자기의 이야기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점을 생각하고 작업을 한다.

큐레이팅의 글

홍지연


노마드 nomad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다. 그런데 노마드는 비단 이 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공간적 표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없이 떠돌기보다는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꾸며,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창조적인 행위가 노마드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들뢰즈 Gilles Deleuze는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라고 했고, 특정 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철학적 개념을 ‘노마디즘 nomadism’이라고 했다.

임성수 작가의 신작 <Manual for Nomad> 연작은 물방울을 닮은 개체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 이동하는 경로를 드러내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선택과 조합에 대한 다양한 경우를 제 시해 놓아 그 경로의 끝에는 기존에 없는 새로운 형상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 뫼비우스 띠와 같은 경로의 반복 속에는 권력과 부,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나 우리 사회의 레이시즘, 또는 순환과 생명에 대한 것이 임성수 작가 특유의 과감한 유희를 통해 드러난다. 작품 속 경로는 목적지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 니라 다양한 경험과 사유를 하도록 만들어진 매뉴얼이다. 작가가 여러 가지 시행을 거듭하 며 최적의 낯선 경로를 찾아내서 그것을 매뉴얼로 표시해 놓은 방식은 작품 속 숨겨진 서 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작가와 너무나 닮은 물방울은 작가의 또 다른 페르소나로 보인다. 그들이 이어가는 그림 속의 경로는 단지 다른 개체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동안 작가 자신이 행했던 노마드의 경로가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찰리 카프먼 감독의 <시세도키, 뉴욕>에서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닌 인물인 케이든과 아델 이 나온다, 케이든은 그가 본 것을 무한대로 팽창시키는 제유의 방식이고, 아델은 돋보기를 사용해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점점 축소 되어가는 제유의 방식으로 작업한다. 제유는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표현법인데,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의 ‘빵’처럼 모든 음식 을 빵으로 지칭하는 것이 축소하는 제유이다. ‘한국이 독일을 2대0으로 이겼다.’처럼 축구팀 을 한국으로 지칭하는 것이 확대하는 제유이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일관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확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축소하여 인지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는 서로 방향이 다른 두 제유가 공존하지 못하고 충돌했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임성수 작가의 연작 안에 흥미롭게 같이 자리 잡고 있다.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 다 자신과 자신이 있는 공동체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이번 임성수 작가의 <Manual for Nomad>를 통해서 다양한 시선으로 새로움을 찾는 노마드를 경험했으면 한다.